1970년대 초 대한민국 안보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1. 21 청와대 습격, 울진·삼척 침투,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 북의 도발은 거칠 것이 없었다. 평양서는 괴수 김일성 환갑 잔치를 서울에서 열자는 충성 구호가 등장했다고 한다. 미국은 아시아 방위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닉슨 독트린에 이어 주한 미군 7사단 2만명 철수를 일방 통보했다고 했다
이때는 남한 군사력이 북한에 1대 3으로 열세였고, 한국군 탱크는 2차 대전때 쓰던 76㎜포 장착 M-4, 북한군 탱크는 1950년대 말 배치된 100㎜포 장착 T-55, T-59였다고 한다.
한국군 전투기는 200기 정도였는 데 반해 북한은 최신예 미그 21을 포함해 580기였다고 한다. 12노트의 속도밖에 내지 못하는 우리 해군 함정이 25노트 북한 함정에 나포되는 사태도 벌어졌고. 북한은 화포, 탱크까지 생산하는데 우리는 소총 한자루 만들 능력이 없었다고 했다. 이에 1971년 11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상공부 차관보를 제2 경제수석에 임명하여 예비군 2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 개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당시 미국은 한국산 화포 개발에 “No, Gun Never”라고 반대했다. 병기가 필요하면 미국에서 구입하라는 것이다. 이런상황하에서 무기를 자체 개발밖에 방법이 없었다. 육군 장비를 분해해서 치수를 잰 뒤 도면을 작성하는 역설계에 해서 시행한 결과.1971년 12월 16일, 청와대에시제품이 전시됐다. 빨간 카펫 위에 60㎜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이 놓여졌고 처음 보는 국산 병기의 그럴듯한 겉모습에 무기를 열람한 사람들은 감격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당시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까지 했을 까.
만찬에서 박 대통령은 오 수석에게 오늘은 임자가 내 앞에 앉아 라고 했다고 한다 그동안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배려다. 청와대 신관 30평 반 지하실에 병기 진열장이 마련됐고. 박 대통령은 아침 산책길마다 들러 병기 개발 상태를 점검했다고 한다. 그후 1972년 4월 3일 보병 26사단에서 그동안 만들은 무기 시사회가 열려. 5개월 날림 작업으로 생산된 병기가 과연 작동할 것인가 의문이었지만. 그자리에는 3부 요인뿐만 아니라 각 군 총장이 참관했다고 한다. 카빈총과 기관총 사격이 첫 번째였다. 사고가 날까봐 내빈석은 300m 멀리 설치됐는 데 놀랄 만큼 명중률이 높았다고 했다. 표적에 달아둔 타일과 접시가 산산조각 날 때마다 함성이 터졌다고 한다. 대전차지뢰 폭발 때에는 10m가 넘는 불기둥이 치솟았고. 내빈석으로 시커먼 캐터필러 조각들이 날아오자.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대피 소동이 벌어졌다 한다. 이런 상황을 보고 다급한 나머지 국방장관이 벌떡 일어나 중지라고 외쳤다. 그러나 국산무기 만들기를 희망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쌍안경으로 폭발 지점을 관찰하더니 순서대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시사회는 성공리에 마무리됐고. 박 대통령은 병기 진열대로 향했다. 81㎜ 박격포 포신을 쓰다듬었다. 이게 우리가 만든 최초의 국산무기였다. \
우리나라 방위 산업이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의 판매 계약을 체결하며 수주 잔액이 100조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뛰어난 가성비와 철저한 납기 준수로 경쟁력을 인정받은 결과일 뿐만 아니라 윤석열대통령께서 그동안 국익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온 결과다. 지난해 12월 폴란드 대통령은 계약 넉달만에 배달된 K2 전차와 K9 자주포를 해군 기지까지 나와 마중했다고 한다. 방산 강국 코리아가 자유 민주주의의 무기고 역할을 하고 있다. 50년전 박정희 대통령이 황무지에 뿌렸던 씨앗이 맺은 열매 그열매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재탄생시켜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