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 한 조각 못 만드는 나라에서 초대형 조선업의 종합계획서를 보고하니 다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을 했는 데 박정희대통령께서는 달랐다고 했다. 그의 보고내용에는 조선업이 철강·기계·전자 등 산업 유발 효과도 크고 장차 해상 물동량이 늘어나 유망할 것이라는 그의 비전을 경청하고 수용했다 한다. 1968년 청와대 직제 개편으로 경제수석이 신설되자. 대한민국 초대 경제 2수석에 엘리트 36세 엔지니어 신동식을 기용했다고 했다..
지금부터 58년 전 대한민국 대통령의 두 번째 미국의 국빈 방문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나 극빈국 정상은 맘 편히 환대를 누릴 수 없는 처지였다고 했다.
월남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존슨 대통령이 초청해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께서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고 했다..공식 일정 외에 박정희대통령은 시간을 쪼개 33세 엔지니어 신동식을 만나 종이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며 3면이 바다인데 고기를 잡든 유람선을 만들든 배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존슨 대통령이 비행기 보내줘서 타고 왔는데 자리 남으니 나랑 같이 귀국하자고 그를 설득했다고 했다..
1932년생 신동식. 6·25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부산에서 미국 군함에 실려온 군수물자와 구호품을 점검하는 일을 하면서 운명처럼 서울대 조선공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조선업 일자리는 없었다. 세계 각국에 편지를 보내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그러자 스웨덴 코쿰 조선소가 여비를 대주며 설계부 엔지니어로 받아줬고. 기능공 양성소에 입소해 선박 설계를 배웠다고 했다. 이때부터 32세의 신동식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바다를 제패해 세계를 지배한 영국으로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명성의 로이드선급협회 국제 검사관이 되어 조선업계 꿈의 직장인이 되었다고 했다. 1961년 일본 파견 근무 때에는 박 대통령과 첫 만남이 이뤄졌고 그이후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을 맡아 귀국했지만 진척이 더딘 현실에 다시 미국선급협회 검사관으로 떠났다고 한다.
4년 뒤 방미 길에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만나 청와대 1급 정무비서관으로 데려와 말이 발탁이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의 가난한 나라에서 외국 가서 돈 끌어오고, 기술 얻어오고, 원료 들여오고, 인재 모셔오는 ‘대통령 공인 국가대표 거지’ 역할도 맡았다고 했다. 젊은 나이의 신동식이 고달픈 책무를 다 감당했던 건 국가 발전에 혼신을 쏟는 전문가로 인정하고 믿어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께서는 데한민국이 조선업으로 성공하기 위해 몸소 지원에 나섰다고 했다.
대한민국 경제 기적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시발로 국책 연구소들을 만들고 기술 자립도를 높여가며 정부 주도로 중공업 육성 경제를 설계해 기업들로 하여금 실행에 옮기도록 한 덕에 가능했다고 했다.
그 씨앗은 1960년대에 뿌려졌고 6년이 지난 1966년 방한 때 존슨 대통령에게 받을 선물 보따리를 놓고 존슨 대교를 짓자”는 등의 발상이 나왔지만.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는 신동식 비서관의 의견에 따랐다고 했다.. 박정희대통령께서 직접 홍릉 임업시험장으로 달려가 KIST 부지를 정하고 수시로 건설 현장을 들러 보시고 공사를 챙겼다고 했다. 그후. 신동식은 조선·철강·기계·화학·전자 등 제조업 중장기 발전 계획 등을 수립하고 6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한 뒤 조선업계로 다시 돌아가 편한 길 대신 경영난을 겪던 중소기업인 한국해사기술을 인수해 반세기 동안 선박 설계 및 감리를 도맡았다고 했다.
경비정, 고속정에서 부터 컨테이너선, 유조선, 쇄빙선, 핵폐기물 운반선, 심해자원탐사선에 이르기까지 2000여 종 선박을 설계했고. 그결과로 2003년 대한민국 조선업이 세계 1위에 등극하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은 날,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 신동식은 국립현충원을 찾아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1시간 넘게 머물며 “그렇게 염원하셨던 해양 입국의 꿈이 드디어 실현됐다”고 긴 보고를 올렸다고 했다..
‘한국 조선업의 아버지’로 세계 조선업계에는 널리 알려졌지만, 공직에 남지 않아 그에 대한 기록을 조목조목 찾기는 어렵다고 한다. 얼마 91세인 신동식 초대 경제수석의 글에 의하면 50여 년 전 공적 못지 않게 주목할 건 세계 조선업계 최고령 현역으로 쉼 없는 도전을 이어가는 그의 도전정신이었다. 그를 보면 대한민국 산업화에 기적이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란다..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